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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사회, 문화

‘레미제라블’의 인물, 역사, 배경을 알고 봅시다!

by [편하게살자] 2023. 11. 13.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비참한 사람들)은 빅토르 위고의 원작소설을 기반으로 뮤지컬, 영화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왼쪽부터 원작소설, 뮤지컬, 영화

 

그러나 이 작품에 감동을 받으셨다고 해도, 작품이 다루는 시대적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알고 계시겠지만, 19세기 100년 동안 프랑스에서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혁명만 3차례, 유혈 사태는 그보다 훨씬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레미제라블’을 더 잘 이해하실 수 있도록 이 작품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프랑스 역사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프랑스 대혁명 7년 후, 배 고픈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친 장발장

 

‘Look down’

 

고개 숙여, 하늘에는 신이 없고, 땅에는 자비가 없고, 나는 죄가 없네. 주님은 관심도 없어. 고개 숙여. 모두 다 널 잊었어. 넌 영원한 노예일 뿐

 

‘Look down’

 

 

‘장발장’은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다 19년 동안 노역을 하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한 인간의 불행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1789년 프랑스에서는 극심한 굶주림과 신분제에 대한 불만으로 혁명이 일어납니다. 민중들은 국왕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왕이 없는 나라’, 즉 공화국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흔히 알려져 있는 ‘프랑스 대혁명’입니다.

 

혁명 이후 프랑스는 굶주림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큰 소용돌이에 빠집니다.

 

오스트리아 등 이웃나라들은 자국으로 혁명이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 프랑스에 군대를 파견했고, 쫓겨난 왕족과 귀족들이 이들과 결탁했습니다.

 

혁명지도부는 외국군과 내부의 반혁명 세력과 전쟁을 벌이면서 한편으로 내부 권력다툼에 돌입합니다.

 

전쟁과 혁명의 아수라장에서 경제는 엉망이 됐습니다. 날로 물가가 치솟아 민중들의 고통이 극심했습니다.

 

혁명지도부 중 가장 과격파였던 로베스피에르1793년 정권을 장악한 뒤 ‘최고가격제’를 실시해 일시적으로 물가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1년 동안 1만 명 이상을 ‘반혁명’ 혐의로 처형하는 등 지나친 공포 분위기 조성으로 2년 만에 실각합니다. 최고가격제는 폐지되고 다시 물가는 뛰어올랐습니다.

 

바로 그 이듬해인 1796년 장발장은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치다 체포됩니다.

 

프랑스의 혼란은 1799년 군인 출신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비로소 일단락됩니다.

 

나폴레옹은 외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국내 반혁명 세력을 소탕하는 한편, 토지분배·법 제도 정비·초등교육 확립 등의 정책으로 사회를 안정시켰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통령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1804년 스스로 황제에 즉위, 반혁명 위협이 사라졌는데도 외국과 계속 전쟁을 벌였습니다.

 

지속적 전쟁으로 사람들이 점점 나폴레옹에게 지쳐가던 무렵, 그는 워털루 전쟁에서 패해 1815년 완전히 몰락합니다. 바로 이 해 장발장이 출소합니다.

 

산업화가 불러온 부르주아, 알코올 중독자, 부랑아, 매춘의 시대

 

At the end of the day

 

하루가 지나가면 또 하루 늙어갈 뿐. 이것이 가난한 자들의 삶. 주머니에는 1주일을 버틸 돈만 있어. 뼈 빠지게 일 안 하면 굶주릴 수밖에 없네.

 

At the end of the day

 

 

나폴레옹 몰락 이후 프랑스에는 외국으로 망명했던 루이 16세의 동생들이 돌아와 차례로 즉위합니다. 오랜 전쟁에 지쳐 평화를 갈망하던 프랑스인들은 왕정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혁명세력의 눈치를 살피던 왕이 점차 언론자유를 탄압하고 선거권을 축소하는 등 과거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이자 1830년 7월 다시 한 번 혁명을 일으켜 새왕을 세운 것입니다.

 

이 혁명을 ‘7월 혁명’이라 부릅니다. 이 때 왕위에 오른 것이루이 필리프입니다. ‘레미제라블’은 이 시대를 무대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루이 필리프는 왕족의 신분이지만 혁명의 이념을 지지하고 시민의 대변자가 되겠다고 공언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약속대로 자유, 특히 언론·출판과 산업활동의 자유를 크게 보장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 마련된 법·제도와 안정된 정치질서를 바탕으로,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진행됩니다. 직물·금속공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달하고 수출액도 늘어났습니다.

 

장발장은 앞서 1820년대 프랑스 북부 소도시 몽레이유에서 새로운 구슬 공정을 개발, 기업가로 거듭나며 크게 성공했는데, 이 지역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다른 프랑스 지역보다 산업화가 먼저 진행된 곳이었습니다.

 

공장을 소유한 부르주아들은 산업화로 인한 성장에 힘입어 예전의 귀족과 같은 지위를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성장의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도시 인구는 갑자기 늘어났지만 주택, 수도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불량한 위생으로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발생했고, 이때마다 슬럼가에 사는 빈민들은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1831년 콜레라 대유행이 단적인 사례입니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물가도 함께 오르는데 임금은 턱없이 낮았습니다. 빈민가의 남성들은 시름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여성들은 살기 위해 매음굴로 흘러들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버려져 부랑아가 됐습니다.

 

부르주아의 시대이자, 거지와 부랑아와 알코올 중독자, 그리고 매춘의 시대였습니다.

 

팡틴과 가브로슈, 테나르디에 일당은 이러한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장발장’과 같은 선량한 자선가가 없지는 않았지만 자선에 기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정부는 ‘산업 자유에 관한 원칙’에 따라 부르주아들을 전혀 규제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바리케이드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자유를 위해 싸우던 민중들, 빵을 위해 싸우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분노에 찬 사람들의 외침이.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다짐이로다.

 

 

1831년 11월 프랑스 대표적 공업도시인 리옹에서 노동자 수천명이 가담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지역은 프랑스 견직물 공업의 중심지로, 전체 수출액의 30%를 생산하는 곳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오르는 물가에 비해 임금이 턱없이 낮다며 ‘최저임금’을 협상했지만, 공장주 1400명 가운데 104명이 이에 불응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리옹 지역의 노동자 전체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한때 시정까지 장악했지만, 정부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해 잔인하게 탄압했습니다. 공장주 90% 이상이 합의한 최저임금법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노동자들의 결사의 권리 등도 크게 제한됐습니다.

 

리옹 사건을 계기로 빈민과 노동자들, 공화주의 성향의 학생들은 7월 왕정(루이 필리프)에 등을 돌렸습니다. 걸핏하면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1832년 6월 5일, 나폴레옹의 부관 출신 국회의원으로 ‘민중의 편’에 섰다고 평가받는 라마르크의 장례식을 계기로 일어난 폭동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마리우스는 왕정을 뒤엎기 위해, 장발장은 마리우스를 구하기 위해 이 폭동에 참여합니다.

 

 

바리케이드가 십수개 이상 세워지고 약 800명이 사망한 대규모 폭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정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1835년부터는 폭동도 잦아들었습니다.

 

이후 프랑스는 부르주아 문화를 꽃피우며 번영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바리케이드 몰락 이후 이어진 시련

 

영화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은 1848년 2월 혁명을 암시하는 듯한 합창으로 끝납니다.

 

1835년부터 안정을 유지했던 루이 필리프 왕정1846년 대흉작으로 또다시 물가가 폭등하고, 실업자가 급증하면서 위기를 맞습니다.

 

마침내 1848년 2월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돼, 루이 필리프 왕정을 끌어내리는 데 성공합니다. 이것이 ‘2월 혁명’입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민주공화정이 정착하기까지 더 오랜 긴 시련을 겪습니다.

 

2월 혁명 이후 성립된 공화정은 사회주의자들과 보수파들의 갈등으로 불안정했습니다.

 

결국 1851년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2제국을 선포하고, 프랑스는 다시 왕정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프랑스에 옛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배하여 퇴위하였습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나폴레옹 3세의 퇴위로 프랑스는 공화정으로 전환되었으나, 공화정 정부는 노동계급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계급과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봉기는 성공하여 자치정부 '파리 코뮌'이 수립되었지만, 정부에 진압돼 약 3만명이 처형당하며 처참하게 끝났습니다.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출범한 ‘제3공화정’에 가서야 프랑스는 극좌와 극우 사이를 오가지 않고 민주공화정으로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며

 

이렇게 프랑스는 19세기 동안 혁명과 반혁명의 반복을 겪으면서 사회적 변화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거의 100년이 걸린 것입니다.

 

‘레미제라블’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각자의 삶을 살면서도 역사의 흐름에 휘말리고, 그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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